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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7. 17. 21:17 Re-View/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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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저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출판사
지만지 | 2010-09-15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지하생활자의 수기』는 인간의 본바탕은 선하다는 체르니셉스키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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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생활자의 수기.

 

제목만 들어도 어두침침한 이 책은 실제로 어두침침하다. '비정상적'이고 '찌질'한 '지하인'이 자신의 수기 (혹은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지하인은 가난한 귀족이다. 그는 돈이 없으면서도 귀족의 체면을 지키기 위하여 음흉하고 늙은 하인을 굳이 집에 두고 있다. 이런 그의 숨길 수 없는 찌질본능으로 말미암아 그는 친구들 사이에서 따돌림을 당한다. 자신이 따돌림 당하는 것을 알면서도 지하인은 뻔뻔하게 친구들의 모임, 귀족들의 모임 자리에 나간다. 자신을 대놓고 경멸하는 한 친구를 죽여버리겠다고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막상 그 친구에게 따지러 가는 길에 자신이 그보다 못하다는 온갖 상상을 다 하여 이른바 '열폭' 끝에 결국은 복수도 하지 못하는, 그런 소심함의 결정체다.

 

이런 전반적인 캐릭터 설명만 들어도 그의 찌질함이 와 닿지 않는가. 이 찌질한 지하인의 수기는 1부와 2부로 나뉘어 있다. 쉽게 말하면 1부는 이론편, 2부는 응용편이라 할 수 있다.

 

 

먼저 1부는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자신의 처지에 대한 통렬한 지각과 함께 자신이 '찌질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것에 대해 고통을 느끼는 사유를 기술해 놓았다. 그러나 자신이 찌질하다는 것을 안다는 사실로 기뻐한다. "나는 찌질하다!!!!!" 라고 큰소리로 외치고 다니며 실실 웃는 사람이랄까. 이런 행태만 보더라도 지하인은 비정상적이고 미친사람으로 분류될 만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비정상인'으로 그려지는 지하인에 대하여 엄청난 공감을 하게 된다. 속으로는 모두 속물적인 생각과 가치를 추구하면서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현대인들에게 가하는 도스토옙스키의 일침이랄까. 너희들은 다 미쳤어. 이렇게 통렬히 까발려주니 어때? 하고 비웃는 듯 하다.

 

실제로 책을 읽다 보면 몇번 헛웃음이 나오거나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를 띠며 읽게 된다. 가끔은 '이걸 꼭 글로 써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 만큼 평소 머리속으로 생각하고 흘려보냈던 잠재적인 찌질한 생각들을, 지하인은 모두 수기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지하인의 수기를 읽다가 나오는 헛웃음과 조소는 책을 읽고있는 나 자신에 대한 헛웃음이고 조소임을 알게 된다.

 

 

2부로 들어가면, 지하인이 겪은 하루동안의 일을 쓰면서 자신이 어떤 생각을 했고 그것을 좋게 포장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들여 어떻게 말로 내뱉었는지를 1부에서 썼던 자신의 생각이 어떻게 생활에 적용되는지 쓰고 있다.

 

2부에서 흥미로웠던 것은 뼛속까지 꼬여있는 (어떻게 보면 오히려 완전무결하게 순수하다고도 볼 수 있는) 지하인이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다. 이것을 두고 지하인은 스스로도 받아들이지 못할 해프닝으로 여기고 있는 듯 한데, 그를 바라보는 하인에 대한 묘사가 압권이다. 자신의 밀린 임금을 달라고 하는 듯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주인을 약 3분간 째려보는 하인의 태도를 파악하고 지하인은 일부러 말을 돌려버리고 더 위엄있는 척 하여 그 순간을 모면한다. 이렇게 미묘한 찰나의 순간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인을 통해 놓치지 않고 있다.

 

 

책의 제목에서 '지하'가 나타내는 것은 우리의 일상적 시공간과 같다.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무시하는 현대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지하'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지하는 여기서 곧 정해진 이념, 규칙, 정정화된 개념이 아닌 또 다른 가능성에 대한 모색의 여지를 지칭하기 위한 기호가 된다. 

 

이러한 조건의 시공간에서는 우리의 개성을 찾아가는 시도는 곧 일탈을 의미한다. 지하인은 실제로 아프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지하인은 어딘가 아픈 사람처럼 보인다. 닫힌 세계 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인식하는 것 만큼 남들이 보기에 미친 사람처럼 보이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책에서 종종 보이는 지하인의 모습 - '귀족'이라는 체면을 위하여 겉치레를 하는 등의 모습들 - 은 또한 '변덕'을 통하여 그것을 탈피하고 있다. 사랑에 대하여 회의적이고 냉소적이었던 지하인이 어떤 여인을 만나면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깨우친 것처럼 말이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변덕'의 미덕을 알 수 있다. 면덕은 단지 나쁜것이 아니라 체면이나 타자의 시선 때문에 우리가 지향하는 바를 하지 못하는 것을 탈피하는 행위임을 시사해 주고 있는 것이다.

 

 

짧지만 지금까지 살았던 나의 인생 지론인 '찰나의 순간에 우주가 담겨있다'는 나의 말을, 지하인은 진심으로 공감해 줄 것 같다. 사실 우리가 찌질해 지는 건 찰나의 미묘한 순간이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고 내가 원하는 바를 쭈뼛쭈뼛 실행하지 못할 때. 이를 놓치지 않고 신랄하게 까발렸다는 점, 또한 그를 통해 우리가 찌질한 모습을 깨우치는 것이 최대의 복이라는 점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야기하고 있다.

 

 

이 책을 읽고도 지하인에게 하등의 공감도 못한다면 당신은 둘중의 하나일 것이다. 완전체이거나, 스스로에게까지 가식을 떨고 있거나. 지하인은 이렇게 외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찌질하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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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Debby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