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따르는 교수님이 계시다. 그분을 처음 뵈었던 학기의 첫 수업시간에 이런 말씀을 하셨다. "너의 서브젝티비티subjectivity 그리고 존재감presence를 항상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이야기는 학기 내내 반복되면서 내 안에서 하나의 알맹이로 굳어졌다. 살면서 몇 번쯤 찾아오는, 번쩍 하는 깨달음의 순간들, 즉 어웨이크닝 모먼트awakening moment들의 소중함, 그리고 낭만적, 이상적 이야기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온 마음으로 이야기 해 주신 교수님. 그분의 강의를 들을 때 마다 속으로 혼자 생각하거나 일기장에 끄적거린 나만의 생각이 구체화되고 이미 '문화 이론'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의 희열은 아직도 생생하다. 지금까지 내가 생각해 온 것들이 적어도 틀리지 않았다는, 나 혼자만 그런 생각을 한 것이 아니라는 안도감에 눈물을 흘릴뻔 한 적도 있었다.
주체성과 시/공간적 존재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듯'한 무수한 사람들 속에 정말로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생을 이끌어 가는 '진짜'들이 몇이나 있을까. 찰나의 순간 속에 우주가 담겨있다고 느끼는 순간들의 나열이 내 삶이라면, 매 순간 내가 정말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정말 '살아'있기나 한 것일까.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해 주신 교수님이 추천한 여류작가가 바로 전혜린이다. 수업시간에 여러 책들을 소개해 주셔서 다 읽으려고 무던히 노력중이지만 쉽지 않다. 그런 와중에 접하게 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 책이지만 결코 가볍지 않은 그런 책이었다. (적어도 나에겐)
이 책을 한줄로 요약정리 한다면, 위에 교수님께서 가르쳐 주셔서 나에게 알맹이가 된 것들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겠다. 전혜린은 정말 순간순간을 '살았'던것 같다. 그리고 그 느낌을 글로 풀어내는 능력도 매우 탁월하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치 내가 전혜린이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만큼. 작가의 손을 떠난 글은 이미 독자의 것이라는 "작가의 죽음"이라는 말은 여기서만큼은 예외라고 생각될 만큼 상황과 그에 대한 그녀의 생각과 느낌이 와 닿는다. 그녀와 내가 같은 모국어를 쓴다는 것이 감사할 정도. 적어도 번역으로 인한 느낌의 반감은 없을테니 말이다.
그녀가 내면에 가지고 있던 어둠, 빛, 환희, 슬픔, 무력감 이런 것들이 바로 날아와 마음에 스민다. 전혀 슬픈 내용이 아닌데 그 감정이 너무 생생히 느껴져서 지하철안에서 읽다가 눈물을 흘렸을 정도로.
독일에서 유학할 당시의 느낌과 생각들, 그리고 그녀가 아이를 낳고 생각한 것들이 개인적으로 가장 와 닿았다. 낯선 곳에서 동시에 느껴지는 불안함과 설렘, 예기치 못한 사람, 사물, 장소와의 만남은 글로만 읽어도 참 좋다. 내가 이방인에서 서서히 낯선 곳의 삶에 물들어 가는 과정을 여행에서도 즐기려 노력하는 나여서 그런지도 모른다. 또한 부모와 자식에 대한 그녀의 생각도 읽는 내내 휙휙 날아와 꽃힌다. 엄마와 딸의 관계에 대하여 생각이 많은 요즘이어서 그런가, 내가 나중에 딸아이를 낳아도 꼭 이런 느낌일 것이라 생각된다.
정제된 듯 보이지만 날것의 느낌을 가진 문체로 삶에 대한 사유를 조근조근 이야기하는 이 책은 한 문장, 한 단어 놓칠세라 모두 씹어 삼키고 싶었다.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읽었을 때 그녀가 남긴 이 느낌들은 분명히 나의 삶의 맥락에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임을 확신하기에 방 책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꽃아 두었다.
정말 '살아있음'을 만끽한 그녀가, 그토록 예뻐하고 자신보다 아끼는 아이까지 있는 그녀가 자살로 생을 마무리한 이유에 대해서는, 그래. 더 많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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