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랑 블루 Le Grand Bleu (1988)
뤽 베송 감독
장 르노, 장 마크 바, 로잔나 아퀘트
내가 본 것은 최근에 개봉한 리마스터링 감독판. 이 영화의 나이가 나와 동갑이라니, 개봉한지 25년이 지난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보았다.
아무 사전정보 없이 본 작품인데, 사실 한국판 포스터를 보고 '프리윌리'랑 비슷한 내용인가? 짐작하기도 했더랬다 (ㅋㅋㅋㅋ 휴) 보자마자 든 생각은 '아 DVD를 사야겠다' 라는 것. 그만큼 여운이 진하게 남았다.
최고의 잠수 기록을 위해 경쟁하는 자크와 엔조, 그리고 자크의 연인 조안나의 이야기를 바다를 배경으로 끝없는 내적 심연, 무언가에 대한 순수한 열정,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에 대한 고찰이 담겨 있다.
무엇인가에 '푹 빠지다' 라는 표현의 원형은 바다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을까. 바다는 세 주인공 모두의 상황을 완벽히 대변하는 배경 설정이 아닌가 싶다. 엔조와 자크가 잠수할때마다 스크린에 가득 채워지는 푸른색 혹은 검은색과 적절히 덧입혀진 음향은 그 어떤 3D, 4D 영화보다 더 생생한 부피감과 공간감이 느껴진다. 관객들은 이러한 영화적 체험으로 무언가에 '푹 빠져'있는 그들에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자크는 항상 무언가에 홀려있다. 바다에게 그리고 조안나에게. 둘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존재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둘 중 어딘가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한다.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에 대한 긴장감은 극을 클라이막스로 끌고 나가는 힘이 된다.
조안나가 현실이라면 바다는 비현실이다. 아버지와 인어들이 있는 바다는 자크에게 끝없이 그리워 할 수 밖에 없는 노스텔지어다. 조안나를 만나기 전까지의 자크는 돌고래들과 함께 지내며 비현실 속에 살았을 것이다. 너무나 고독하게, 자신의 심연을 헤엄치면서. 그러나 조안나를 만나 사랑에 빠져 그는 말하자면 현실로 나오게 되었다. 자크와 반대로, 바다를 현실로 대하던 친구 엔조가 바다로 돌아가면서 자크는 꿈에서 바다의 환영을 보게 된다.

꼭 봐야 할 것이 있는 바다, 그리고 뭍에 서 있는, 자크의 아이를 가진 조안나. 자크는 '두 여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불어에서 바다는 'la mer', 여성명사이다.) 내려가서 볼 것이 있다고 뒤돌아보지도 않고 이야기하는 자크에게 조안나는 내가 여기 있다고, 내가 여기 '존재'한다고 울부짖는다. 자크는 이 순간, 가고싶은 비현실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이 씬을 꼽겠다. 다리는 바다 속에 담그고 오른손은 조안나의 손을 붙들고 있는 자크. 뤽 베송 감독은 양립할 수 없는 두 세계ㅡ현실과 비현실ㅡ중 어느 쪽 줄을 끊어버릴 것인가 갈등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일렁이는 검은 바다 위에서 부감으로 고스란히 보여 준다.
자크는 그녀의 손에 잠수 크레인 줄을 쥐여 주고, 결국 그녀는 줄을 당긴다. 바다 속으로 끝없이 미끄러져 내려간 자크는 심연에 다다라 잠수 크레인에서 손을 떼고 돌고래를 따라 빛도 없는 그 곳으로 사라진다.

"잠수할 때 어떤 기분이야?"
"추락하지 않고 끝없이 미끄러지는 기분이야. 바다의 밑 바닥에 있을 때가 가장 힘들어"
"왜?"
"올라와야 할 이유를 모르겠어. 그 이유를 찾는게 항상 너무 힘들어."
끝까지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결국 '비현실'을 택한 자크. 그것이 그가 '사는' 길이었을 터. 현실에 발 붙이고도 끝없이 비현실을 갈망하는 사람들에 대한 뤽 베송 감독의 선물이 아니었을까. 뤽 베송 감독도 자크처럼 끝없는 자신의 세계, 심연에서 행복한걸까. 장 마크 바의 몽환적 표정 만큼이나 낭만적인 결말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의 장르를 멜로로 본다면 새드엔딩이겠으나, 적어도 나에게는 해피엔딩이다.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 사람을 떠나보낸 조안나는 그의 아이와 함께, 그리고 마크는 인어들과 영원히 행복할 테니.

OST와 영상이 이토록 잘 어우러진 영화는 참 오랜만이었다. 최첨단 기술 없이도 스크린과 음향 딱 두가지로 이루어진 영화라는 매체의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던 것 같다. 덕분에 3시간 동안 그랑 블루에 푹 빠져 나도 흠뻑 물들어 버린 듯, 기분 좋은 무거움을 지니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늘 꿈은 바다 꿈을 꾸어야지. 자크처럼 끝없는 심해를 헤엄치는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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